체게바라가 쓴 맑스주의 입문서 <공부하는 혁명가> 해제 - 한형식 부소장 한형식 부소장

체게바라가 쓴 맑스주의 입문서 <공부하는 혁명가> 해제




많은 이들이 체 게바라를 존경하고 찬양하고 사랑하며 그리고 소비한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체는 각각의 경우마다 너무나 다른 모습이어서 체가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바람을 체라는 이름에 투사한 가공의 인물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진짜 체는 누구인가? 

책을 번역하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체에 대한 연구 목록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체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런 최근의 연구들은 그가 죽은 지 수 십 년이 지나도록 잘 이야기되지 않았던 체의 면모를 주로 조명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맑스주의자로서 체 게바라 그리고 맑스주의에 입각한 구체적 경제 정책의 고안자이자 실행자로서 체 게바라다. 

한국에서도 체 게바라는 잘 팔리는 상품이다. 한국 사회에서 체가 소비되는 방식도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서구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체를 맑스주의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 자신조차도 체 게바라가 맑스주의에 대해 알긴 했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체 게바라 스스로의 목소리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킨다.

낭만적 혁명가 혹은 몽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급진주의자라는 널리 유포된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의 체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체의 사상은 그의 삶과 그가 의지했던 이론과 그 이론에 근거하지만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검증받는, 혁명적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기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체의 다양한 면모들을 분리시키거나 한 모습으로 다른 모습들을 환원시키는 접근 방식은 그의 사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삶과 사상과 실천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경제학자, 경제 정책 실무자로서의 면모를 지금껏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오해를 확산시킨 커다란 원인일 것이다. 최근의 체에 대한 재조명은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을 꿈꾸는 이들에게 체의 경제사상이 많은 영감을 주기 때문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은 체가 콩고에서의 혁명운동이 결국 실패한 뒤에 탄자니아와 체코 프라하에 머물면서 볼리비아에서의 마지막 실천을 준비하던 시기에 쓴 것이다. 그리고 이 원고는 소련에서 나온 1963년 판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논평과 함께 작성되었다. 체가 그의 짧은 생애의 끝부분에서 소련의 공식적인 정치경제학과 경제 정책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맑스주의자로서 체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물음에 답해보자.

체는 1960년 8월 19일에 한 연설에서 그가 맑스주의자가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여행했던 곳들의 환경 때문에 나는 가난, 굶주림 그리고 질병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었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치료할 수도 없었고 아이들은 계속되는 굶주림과 벌로 마비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는 독서와 관념적 급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현실과의 생생한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맑스주의로 나아갔다. 

체는 쿠바혁명의 다른 지도자들보다 더 일찍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온전히 맑스주의자가 된 때가 1954년 과테말라 시기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는 당시 과테말라의 맑스주의 운동 세력과 그 일원이었던 첫 번째 부인 일다 가데아(Hilda Gadea)의 영향으로 맑스와 레닌의 저작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체는 맑스의 저작들을 상당히 많이 읽었고 맑스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1954년 과테말라의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미국의 독점자본인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과 그 회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덜레스가 책임자였던 CIA의 역할을 알게 되면서 제국주의 문제에 직면한 것도 맑스주의로의 전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과테말라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일어났던 미국이 사주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간 정부가 전복된 일들은 체를 비롯한 많은 라틴아메리카 운동가들에게 무장 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만들었다. 따라서 체의 맑스주의는 처음부터 반제국주의적 관점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과테말라의 쿠데타 이후 건너간 멕시코에서 체는 더욱 공고한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쿠바의 ‘7월 26일 운동’의 구성원들에게 맑스의 저작들로 공부하기를 권한 것도 체 게바라였다. 그는 처음부터 쿠바혁명을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발전시키려 했다. 체가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에 동참한 초기에는 그들과 맑스주의자로서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혁명전쟁에 대한 전술적 측면에서 더 많은 일치점을 가지고 있었다. 체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족개량주의 특히 선거를 통한 개량노선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그는 부르주아 주도의 소위 민족민주혁명을 거부했다. 이것이 그가 게릴라전을 선호한 이유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의 동맹에 근거한 사회주의 혁명만이 라틴아메리카를 영구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의 군사적, 관료적 장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혁명전쟁만이 길이라고 생각했다. 

체의 사상과 실천 중에서 라틴아메리카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혁명전쟁에 관한 것이다. 특히 게릴라 전투의 포코foco(게릴라 거점)전술은 체 노선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과 혁명의 캐리커처, 즉 혁명과 혁명의 희화화로서의 개량주의 사이에서 양자택일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계론적 혁명관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가진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소련의 공식 노선이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그 뒤를 이은 사회주의 혁명이 순차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나라들에서는 게릴라 투쟁 노선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가 그 사례들이다. 

하지만 그의 혁명전쟁관은 명백한 한계도 가진다. 비록 그가 민주적 국가에서의 무장 투쟁이나 맹목적인 테러에는 반대했지만 혁명전쟁을 무장 게릴라 투쟁으로 그것도 포코의 핵심집단의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뚜렷했다. 이 노선을 이어받은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시도들 중에는 무자비한 군사적 탄압에 의해 괴멸된 운동들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멕시코의 차파티스타의 경우처럼 그의 혁명 사상은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 운동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체가 무장혁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전술의 교범이자 정치노선의 표명을 위해 저술한《게릴라전》에는 체 게바라 맑스주의의 특이한 측면 또한 담겨있다. 그는 맑스주의의 정통 노선과는 달리 조직 노동자가 아니라 가난한 농민들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혁명적 계급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 실상을 반영한 것이고 체의 사상에서 맑스주의 이론과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의 변증법이 나타나는 지점이다.

체의 맑스주의는 반교조주의적 성격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라틴아메리카 독립 영웅인 볼리바르에 대해 했던 평가나 맑스와 엥겔스가 당대의 멕시코에 대해 행했던 분석이 부적절하다고 평가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체는 맑스주의가 무오류의 교의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맑스주의에서의 현학적이고 이론주의적인 경향이 맑스주의 철학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맑스주의는 영원한 진리인 거창한 체계가 아니라 혁명적 행동을 위한 지침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을 둔 맑스-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이 그에게는 필요했다. 

반교조주의적 맑스 이해는 대중의 혁명의식에 대한 그의 생각과도 연관이 된다. 체는 혁명을 위한 교육은 위에서 아래로 행해질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진리라고 결정한 맑스주의를 민중들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행태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맑스주의가 이론과 실천, 정치적 노선과 실존적 삶의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체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체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편견들 그리고 일면적 해석들 뒤에 있는 진짜 그의 모습은 이론과 실천, 말과 행동의 통일을 이루려 한 엄격하고 일관된 인간이다. 이런 그의 삶과 사상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대의에 온전히 자신을 바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체에게 진정한 맑스주의는 인간주의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쿠바혁명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맑스주의도 인간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는 산업부 장관 시절인 1964년에 했던 어느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쿠바혁명이 건설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중심에 놓이고, 혁명의 핵심 요인으로서의 인간의 인격이 중요하게 고려되는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다.” 그래서 그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비참, 가난, 착취, 억압과 맞서 싸우는 행위의 지침이 되어야 했다. 

체는 경제에 대한 대논쟁이 진행되던 무렵인 1963년과 1964년 동안 맑스의 초기 저작인 경제학 철학초고를 관심 있게 읽었다. 체는 그 책이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해방과 인간소외를 초래하는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했다. 또 《자본》이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반인간주의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반대했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 《자본》의 핵심 테마라고 그는 보았다. 더 나아가서 체는 맑스주의적 휴머니즘과 나쁜 의미에서의 휴머니즘 즉 기독교적 휴머니즘이나 부르주아의 자선적 휴머니즘을 구별한다. 그런 휴머니즘들이 모두 계급을 초월하는 관점인 반면에 그와 맑스의 휴머니즘은 계급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리고 체의 관점에서 인간의 해방은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체의 휴머니즘은 공산주의 윤리에 대한 강조와 혁명의 이행 과정과 혁명 이후 사회에서 “새로운 인간(el hombre nuevo)"에 대한 강조로 구체화된다. 새로운 인간은 경쟁과 개인주의를 넘어선 이타주의적 헌신의 인간이다. 

그의 윤리적 맑스주의와 새로운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의 경제 사상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체는 시장사회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낡은 수단을 가지고는 사회주의로 갈 수 없음을 강조했다. 체가 시장적 요소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계획경제에 대한 열렬한 옹호와 새로운 인간에 입각한 인간주의적이고 윤리적인 맑스주의다. 그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산 기간이 길게 보아도 13~4년 정도이고 그 가운데 5~6년을 쿠바의 국립은행장과 산업부 장관으로 지냈다. 실제로 게릴라전에 참여한 시간보다도 더 긴 시간을 경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데 보낸 것이다. 그런데도 그 부분이 그의 삶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서 40여년이 흘러왔고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본격화되는 무렵에 와서야 다시 조명되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 체의 경제 사상과 실천이 체의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와 어떻게 종합되는지를 살펴보자.

쿠바혁명이 성공할 무렵 설탕과 그 부산물이 쿠바 수출의 86퍼센트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80퍼센트가 미국으로 수출됐다. 동시에 쿠바는 자본재 수입의 95퍼센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수입이 미국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미국은 연간 설탕 수출 물량을 할당해 쿠바 경제를 미국에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제적 지배가 유지될 수 있도록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혁명 이후 쿠바는 미국 주도의 경제봉쇄 조치에 직면했고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탕수수 단일작물 재배에 의존하는 경제를 산업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미국에만 수출하던 설탕을 1949년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주축이 돼 설립된 경제상호원조회의(CMEA) 회원국들로 돌려야 했다. 이 과제를 체가 주로 떠맡게 되었다. 

1959년 혁명 이후 체가 직면했던 문제는 제국주의의 수탈로 저개발과 독점자본이 혼재된 쿠바 경제를 사회주의로 이행시키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 의지하지 않고 생산능력과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질적 토대와 동시에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물질적 토대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의 강화를 통해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조직과 관리 기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체가 생각하기에 경제적 측면은 독자적인 법칙이 관철되는 자율적인 영역이 아니다. 가격, 분배, 생산은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관점보다는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기준에 근거해 결정되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 개념이 도입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윤리적, 인간주의적 맑스주의는 쿠바의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길과 하나로 이어진 것이었다.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을 쓴 헬렌 야페의 견해에 따르면 금융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던 체 게바라가 국립은행 총재에 임명된 것은 그가 쿠바 경제의 자립을 위해 혁명 정부가 나아갈 길은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 게바라는 은행 국유화 작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이를 통해 “무엇보다 시급한 농업개혁과 산업화가 국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보타주나 장애들에 구애받지 않고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국립은행을 재편해 농업 대출, 산업과 상업 대출, 수입과 대외무역 독점에 역량을 집중하려 했고 이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틀을 놓는 필수적 작업이었다.

체가 중앙은행장에 임명된 과정에서 경제학자를economist를 공산주의자로communist로 잘못 알아들었다는 일화가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 일화는 거의 사실이 아니고 사실이라 하더라도 체와 쿠바혁명 세력이 경제를 하찮게 여겼다는 증거는 결코 되지 못한다. 출처와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이 일화의 유포는 혁명에서 경제 정책의 중요성과 체 게바라가 계획경제의 강력한 옹호자였음을 애써 무시하려는 의도와 공산주의자와 경제학자의 양립을 상상할 수 없는 신좌파적 편견의 산물일 뿐이다. 이런 해프닝의 결과로 체가 중앙은행장이 되었다면, 그의 임명 소식에 뉴욕주식시장이 요동치고 외국 자본가들이 쿠바에서 투자금을 대규모로 회수하는 일이 일어났겠는가? 당시 미국 정부가 쿠바혁명이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고 판단한 근거로 체를 지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61년 2월, 게바라는 산업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동구권 국가들은 소련이 개발한 경제관리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 시스템은 국유화와 중앙계획경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생산력 발전을 위해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적 요소 특히 경쟁과 물질적 인센티브 그리고 경제 주체들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쿠바에서 이 시스템은 자율재정시스템(AFS)으로 불렸다. 체는 상품, 시장적 기준, 관리자의 경제적 특권, 경쟁 등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낡은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식 시스템에 반대해 쿠바에 대안적인 경제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예산재정시스템(BFS)이라는 이 경제관리시스템은 혁명 이후 국유화한 미국의 독점자본 기업들의 선진 생산관리 기법을 연구한 결과 만들어진 독특한 경제관리시스템이었다. 

1963~1965년 동안에 전개된 ‘대논쟁’은 이 두 시스템 중에서 어떤 것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나뉜 집단 간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논쟁의 핵심은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사회에도 여전히 관철되느냐는 것이었다. 소련의 공식 입장은 가치법칙의 존속을 인정했고 체는 가치법칙의 완전한 철폐가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가치법칙을 종식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와 경쟁 및 인센티브에 대한 거부가 필요했다. 달리 말해 이 논쟁은 경제를 수익성에 따라 조직할 것인가 사회적 필요에 따라 조직할 것인가의 논쟁이기도 했다.

체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로서의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생산력 발전만큼이나 공산주의 사회에 필요한 인간 의식과 사회관계를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체는 소련의 노선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재단하기 위해 성장률이나 생산성에만 초점을 둘 뿐 철학적 또는 정치적 측면들에는 무관심하다”고 보았다. 그는 1963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적 도덕, 사기, 의욕이 없는 경제적 사회주의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가난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소외와도 싸우고 있다. … 만약 공산주의가 의식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그것은 분배의 한 방법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혁명적 도덕은 아니다.” 그는 1964년 말 모스크바 방문 이후 동유럽에서 시장 법칙의 영향력 확대가 경제발전을 지체시킨다고 비판했다. 또 자본주의적 수단에 의지한 이행기 전략은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불행히도 이 경고는 30년이 채 안 되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급속한 자본주의화로 실현되었다. 

체가 소련의 경제 노선과 거리를 둔 것은 반제국주의 투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후르시쵸프의 소련 정권은 서방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식민지 민족해방혁명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서구의 좌파들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소위 ‘데탕트’를 제3세계 좌파들은 극렬히 비판하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체가 1965년 2월에 반제민족해방운동들을 지원하지 않는 소련을 “제국주의의 공범”이라고 비판하는 연설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에 의존하지 않고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 건설의 모색이 절실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 계획 경제는 관료제와 위로부터의 계획이 초래하는 권위주의와 연결된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는 비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또 좌파들 가운데에서도 계획경제와 국가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고 거부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경제적 계획이 정치적 권위주의로 연결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결부된 계획은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체가 명시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과 반권위주의는 분명하다. 체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윤리에 충실한 인간이 정치적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계획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회주의를 꿈꾸었다. 

체의 경제사상 특히 계획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계획을 스탈린주의의 폐해와 동일시하며 국가주의를 물신주의적으로 비판했던 신좌파들은 이제 신자유주의에 수렴되어버렸다. 계획경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은 국가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관료제에 기반을 둔 권위적 독재와 계획이 반드시 함께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누가 계획하는가라는 물음을 근본에서부터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구체성을 잃어버린 물신주의적 국가주의 비판, 계획경제 거부를 벗어나서 민중이 통제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생산과 분배의 계획화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과 함께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다. 국가로부터 동떨어진 대중의 자생적 조직을 촉진하는 것을 넘어서서 국가의 토대 자체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전기적 소개인 이 책은 체 게바라의 이런 사회주의관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실존적 차원에서의 윤리적 삶과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한 실천을 통일시키려했던 체의 모습이 이 책에 담겨있다. 그가 실존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맑스와 엥겔스를 소개하는 것은 개인적 동기에서만이 아니다.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고 모든 혁명가에게 물질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발적 노동을 요구했던 체 게바라의 새로운 인간관이 맑스의 실존적 삶에 대한 관심의 근본 동기다. 체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던 자본주의적 가치를 넘어서는 삶의 방식을 우리가 온전히 실천할 수는 없더라도 이런 생활과 활동의 방식의 경험이 없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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